지난 4월 30일은 베트남 종전 35년이 된 날이다. 4월 30일은 월남의 사이공이 함락된 날을 기준한 것이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미국은 말할수없는 재산상의 손실과 인명의 손실을 당했고 아직도 많은 사람이 육체적, 정신적 부상의 상처에서 아물지 않고있다.
미군은 2차세계대전 종전이후 냉전의 결과로 군대의 숫적인 증가가 결국 베트남전에 (1968년기준) 무려 50만명이라는 군인을 쏟아 붇게 만들었다.
워싱턴 DC에는 베트남 참전 군인 5만8천여명의 전사자가 묻힌 묘지가있다.
여기 35년이 지난 베트남전의 실상을 다시 한번 볼기회를 가져보자

1965년 미군의 UH-1헬기가 남베트남 군인이 전진하기 위한 엄호를 위해 공중 지원사격을 밀림에다 대고 사격을 하고있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UH-1헬기의 양쪽에는 기관총 사수가 위치해있다.

사이공 북서쪽의 작전 지역에 투입된 지상 병력을 엄호하기 위해 투입된 미군 헬리콥터

미군의 장비를 지원받은 월남군이 사이공내에서 M41 탱크를 이용하여 베트콩 진지를 공격중이다. 1960년

1965년 사이공의 미 대사관앞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하였다. 사람들이 부상당한 상태로 넘어져있다. 2명의 미군이 사망하고 베트남 서너명이 사망하였다.

미해병대 CH-46 헬기가 작전중 북베트남의 지상 포화에 맞아 화염에 쌓였고 비상착륙을 시도중이다. 하지만 비상착륙은 실패하여 12명이 사망하고, 3명만이 겨우 심각한 부상과 함께 살아 남았다.

전투중 포격으로 파인 구덩이에서 나무위에 매복한 베트콩 저격병의 위치를 쳐다보는 미군들

미해병이 상륙작전을 방금 마치고 대기중에있다.

미공군이 투하한 네이팜탄이 미군이 전진하는 지역 앞에 투하되어 큰 화염이 치솟고있다. 밀림전에 약한 미군이 택한 하나의 전술이다.

한바탕 전투가 치러진 지역에 월남 군인과 미군의 시체가 널려져있다. 약 100여구의 시체가 널려져있고 부패로인한 냄새로 한 군인이 마스크를 하고있다. 1965년 11월이다.

4시간 동안의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진흙 논에서 낮은 포복을 하며 전진하는 미 제 1기병 사단의 병사

미육군이 베트콩의 은거지인 지하 땅굴을 발견하고 들어가기전에 먼저 플래쉬로 내부를 확인하고있다.

월남전 중에 항공모함상에서 화재로인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던 포레스탈 항공모함이다. 함상 화재로 132명이 사망하고, 62명이 부상을 입었고, 2명이 실종되었다. 배는 수리되어 다시 복귀한 상태로 사고후 한달이 지난 뒤의 사진이다.

메콩강 하구의 밀림지역을 초토화 시키기 위해 UH-1D 헬기가 고엽제를 뿌리고있다.


정부의 기독교 중심 정책과 불교 탄압정책에 항거하여 한 승려가 분신을 하고있다. 1966년 5월 29일.

자기 아이의 시체를 안고 멍한 모습으로 장갑차 위의 미군 레인저 부대 병사를 바라보는 베트남인

비가 억수같이 쏟아 지는 와중에 불어난 강을 육군 보병이 자신의 총기를 보호하면서 도하를 하고있다. 맨 앞서가는 병사가 가장 키가 크겠죠? 월남전 중에 개발된 M-16이 한동안 우리군의 주력 소총이 되었죠.

남베트남 군인들이 베트콩 장교로 의심한 한 시민을 끌고나오고있다.

남베트남 경찰 청장이 즉결처형을 하고있다. 방아쇠 당기는 사람이야 뭐 사람 목숨으로 보았겠는가? 총알 하나면, 의심이고, 고문이고, 시간이고, 진실이고 잘못이고 모든게 해결되는데.... 우리의 거창 양민 학살 사건도 이와 다를게 뭐가 있었겠나? 파리목숨이 바로 이런걸 두고하는말.

너무나 태연하고 너무나 당연한 듯한 사람들의 표정.

미국내에서는 장기화되는 베트남전에서 당장 철수를 요구하며 시위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베트남전의 실상을 하나둘 알게된 미국은 반전시위가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영화 포레스트검프에 나오는 화면이다. 워싱턴 DC의 워싱턴 기념비 광장에 모인 반전 시위자들. 1967년.

화염방사기 세례를 받은 정글속의 베트콩 작전 지휘소.

F-100D Super Sabre가 지상군 지원을 위해 2.75인치 로켓탄을 쏘고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저 2.75인치 로켓을 사용한다. 정확도는 기대할수없고, 거의 무차별 사격으로 해결하는 무기다.

북베트남 기지를 공격하기 전, 한 미군병사가 얼굴을 위장한채 지원군의 전개를 기다리고있다.

길가던 베트남 여인과 아이들이 갑자기 총격전이 벌어지자 수로에 몸을 낮추고 두려워하고있다.

작전중 사망한 시신을 철수전 헬기로 끌어올리고있다.

사진의 미해병대는 3일째 고립된 상태로 지속적인 베트콩의 공격을 밤낮없이 받고있는 상태이다. 아침을 맞이하여 좀 잠잠해진 상태에서 여유(?)를 즐기고있다.

1970년 12월 23일 미국본토로부터 크리스마스 위문공연단이 날라왔다.

입대한 미국의 연예인 Sammy Davis 주니어가 동료들에게 노래를 선사하고있다.

산 정상에 위치한 화력 지원 대대(박격포, 장사정포 등)에 군수물자 지원을 위한 헬기 CH-47이 착륙하고있다. 산 정상이 헐벗은 것도 무수한 전투 때문이다. 한때 미군이 만든 영화중 햄버그 힐이란 영화가있었는데, 워낙 많은 사람의 시체가 흙과 나딩굴어 마치 햄버그의 고깃 덩어리를 쌓아 놓은듯 하다하여 햄버그 힐이라 불렀다 한다.

북베트콩의 화력에도 불구하고 미해병대원이 부상당한 동료를 구하고있다. 영화 포레스트검프가 생각난다. "그냥 뛰어" 그래서 5명이나되는 자신의 동료를 들쳐 업고 전선을 빠져나오는 장면......

뉴욕 센트랄 파크에 모인 반전 운동가들이 흰색과 검은색의 풍선을 하늘로 날리고있다. 검은색은 닉슨 정책에 의해 희생된 베트남 전사 군인을 의미하고, 흰색은 앞으로 죽을 군인을 의한다고 한다.

반전운동이 확산되자 미정부는 주방위군을 동원하여 이를 저지하였다. 사진은 1970년 4월 켄트 주립대학교에서 시위하다가 총을 맞은 학생이다. 그는 부상만 당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사망자가 4명이나 발생하여 미국인들의 분노를 촉발하였다.

미국의 항공기 스카이레이더 공격기가 네이팜탄을 베트콩이 숨어있다고 의심되는 한 사원에 투하하였다. 사진의 중심부에 사원의 첨탑이 보인다. 카메라맨과 여러 나라에서 온 기자들이 이를 지켜보았다.

미국의 네이팜탄 투하후 사원에서 어린이들이 뛰쳐나오고있다. 맨 왼쪽의 남자는 눈을 잃었고, 다음의 여자아이는 9살로 온몸에 화상을 입었다. 그녀는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지금도 미국에 살고있다. 이름은 Kim Phuc.

세계의 기사가 이 어린 소녀 Kim Phuc에게 집중되었다. 소녀의 뒷모습에서 화상의 깊은 상처를 볼수있다.

HH-53 helicopter에서 본 전쟁에 나서는 헬기 특전 부대.

자신의 작은 부대에 미국국기 게양

작전중 부상당한 병사를 의무병이 임시 치료했다.

바로 옆에 폭탄이 터지는데도 너무나 태연한 남베트남 군인. 정확하게 이장면을 한 종군기자가 담아냈다.
37. 작전중 베트콩으로 의심되는 한 사람이 억류된 상태이다.

사이공의 미공군 기지 주변에서 폭팔이 발생하고 전투가 벌어진뒤. 사살된 3명의 북베트남 군인의 사체가 보인다.

북베트남의 공격이 정확하게 미군 벙크에 직격했다.

한 공수병이 부상을 당하고 비와 고통을 참으면서 후송을 기다리고있다. 오른쪽 아래의 병사는 사망했는지.....

포로로 잡혔던 로버트 중령이 전후 3년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캘리포니아 트레비스 공군기지. 1973년

미국의 패색이 짙어지고 이곳 저곳에서 철수를 시작한다. 적이 눈앞에 다가오자 긴급하게 철수를 하고있는 미해병과 베트남 해병 기지.

미군이 베트남 여인과 아기를 검쉽헬기에 태워 철수하고있다.

미군 공군 기지를 점령한 베트남 군인들이 미군이 철수하면서 설치한 폭탄이 폭팔하자 대피를 하고있다.

전쟁 막바지인 1975년 4월 29일 베트남 사람들이 미군헬기를 얻어타기위해 미국 대사관에 모여 담을 기어오르고있다.

사이공에서 부터 이송시켜올 더 많은 피난 항공기의 공간을 위하여 마련하기 위해 헬리콥터를 연안 바다로 밀어버리는 미군

미군 해병대의 도움으로 헬리콥터를 얻어타서 사이공을 등지고 수륙 양용 함선에 올라타게된 베트남 어머니와 과 세아이들

1975년 북베트남 군인이 탱크를 몰고 드디어 대통령 관저를 진입하고있다. 전쟁이 끝나는 시점이다. 1975년 4월 30일이다.

이제 대규모의 학살이 시작된다. 대상은 베트남인으로 미군에 협조하거나 베트남 정부를 지지했던 사람들.. 한 여인이 무수한 사람들의 시체를 보고 두려워하고있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미국은 말할수없는 재산상의 손실과 인명의 손실을 당했고 아직도 많은 사람이 육체적, 정신적 부상의 상처에서 아물지 않고있다.
미군은 2차세계대전 종전이후 냉전의 결과로 군대의 숫적인 증가가 결국 베트남전에 (1968년기준) 무려 50만명이라는 군인을 쏟아 붇게 만들었다.
워싱턴 DC에는 베트남 참전 군인 5만8천여명의 전사자가 묻힌 묘지가있다.
여기 35년이 지난 베트남전의 실상을 다시 한번 볼기회를 가져보자

1965년 미군의 UH-1헬기가 남베트남 군인이 전진하기 위한 엄호를 위해 공중 지원사격을 밀림에다 대고 사격을 하고있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UH-1헬기의 양쪽에는 기관총 사수가 위치해있다.

사이공 북서쪽의 작전 지역에 투입된 지상 병력을 엄호하기 위해 투입된 미군 헬리콥터

미군의 장비를 지원받은 월남군이 사이공내에서 M41 탱크를 이용하여 베트콩 진지를 공격중이다. 1960년

1965년 사이공의 미 대사관앞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하였다. 사람들이 부상당한 상태로 넘어져있다. 2명의 미군이 사망하고 베트남 서너명이 사망하였다.

미해병대 CH-46 헬기가 작전중 북베트남의 지상 포화에 맞아 화염에 쌓였고 비상착륙을 시도중이다. 하지만 비상착륙은 실패하여 12명이 사망하고, 3명만이 겨우 심각한 부상과 함께 살아 남았다.

전투중 포격으로 파인 구덩이에서 나무위에 매복한 베트콩 저격병의 위치를 쳐다보는 미군들

미해병이 상륙작전을 방금 마치고 대기중에있다.

미공군이 투하한 네이팜탄이 미군이 전진하는 지역 앞에 투하되어 큰 화염이 치솟고있다. 밀림전에 약한 미군이 택한 하나의 전술이다.

한바탕 전투가 치러진 지역에 월남 군인과 미군의 시체가 널려져있다. 약 100여구의 시체가 널려져있고 부패로인한 냄새로 한 군인이 마스크를 하고있다. 1965년 11월이다.

4시간 동안의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진흙 논에서 낮은 포복을 하며 전진하는 미 제 1기병 사단의 병사

미육군이 베트콩의 은거지인 지하 땅굴을 발견하고 들어가기전에 먼저 플래쉬로 내부를 확인하고있다.

월남전 중에 항공모함상에서 화재로인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던 포레스탈 항공모함이다. 함상 화재로 132명이 사망하고, 62명이 부상을 입었고, 2명이 실종되었다. 배는 수리되어 다시 복귀한 상태로 사고후 한달이 지난 뒤의 사진이다.

메콩강 하구의 밀림지역을 초토화 시키기 위해 UH-1D 헬기가 고엽제를 뿌리고있다.


정부의 기독교 중심 정책과 불교 탄압정책에 항거하여 한 승려가 분신을 하고있다. 1966년 5월 29일.

자기 아이의 시체를 안고 멍한 모습으로 장갑차 위의 미군 레인저 부대 병사를 바라보는 베트남인

비가 억수같이 쏟아 지는 와중에 불어난 강을 육군 보병이 자신의 총기를 보호하면서 도하를 하고있다. 맨 앞서가는 병사가 가장 키가 크겠죠? 월남전 중에 개발된 M-16이 한동안 우리군의 주력 소총이 되었죠.

남베트남 군인들이 베트콩 장교로 의심한 한 시민을 끌고나오고있다.

남베트남 경찰 청장이 즉결처형을 하고있다. 방아쇠 당기는 사람이야 뭐 사람 목숨으로 보았겠는가? 총알 하나면, 의심이고, 고문이고, 시간이고, 진실이고 잘못이고 모든게 해결되는데.... 우리의 거창 양민 학살 사건도 이와 다를게 뭐가 있었겠나? 파리목숨이 바로 이런걸 두고하는말.

너무나 태연하고 너무나 당연한 듯한 사람들의 표정.

미국내에서는 장기화되는 베트남전에서 당장 철수를 요구하며 시위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베트남전의 실상을 하나둘 알게된 미국은 반전시위가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영화 포레스트검프에 나오는 화면이다. 워싱턴 DC의 워싱턴 기념비 광장에 모인 반전 시위자들. 1967년.

화염방사기 세례를 받은 정글속의 베트콩 작전 지휘소.

F-100D Super Sabre가 지상군 지원을 위해 2.75인치 로켓탄을 쏘고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저 2.75인치 로켓을 사용한다. 정확도는 기대할수없고, 거의 무차별 사격으로 해결하는 무기다.

북베트남 기지를 공격하기 전, 한 미군병사가 얼굴을 위장한채 지원군의 전개를 기다리고있다.

길가던 베트남 여인과 아이들이 갑자기 총격전이 벌어지자 수로에 몸을 낮추고 두려워하고있다.

작전중 사망한 시신을 철수전 헬기로 끌어올리고있다.

사진의 미해병대는 3일째 고립된 상태로 지속적인 베트콩의 공격을 밤낮없이 받고있는 상태이다. 아침을 맞이하여 좀 잠잠해진 상태에서 여유(?)를 즐기고있다.

1970년 12월 23일 미국본토로부터 크리스마스 위문공연단이 날라왔다.

입대한 미국의 연예인 Sammy Davis 주니어가 동료들에게 노래를 선사하고있다.

산 정상에 위치한 화력 지원 대대(박격포, 장사정포 등)에 군수물자 지원을 위한 헬기 CH-47이 착륙하고있다. 산 정상이 헐벗은 것도 무수한 전투 때문이다. 한때 미군이 만든 영화중 햄버그 힐이란 영화가있었는데, 워낙 많은 사람의 시체가 흙과 나딩굴어 마치 햄버그의 고깃 덩어리를 쌓아 놓은듯 하다하여 햄버그 힐이라 불렀다 한다.

북베트콩의 화력에도 불구하고 미해병대원이 부상당한 동료를 구하고있다. 영화 포레스트검프가 생각난다. "그냥 뛰어" 그래서 5명이나되는 자신의 동료를 들쳐 업고 전선을 빠져나오는 장면......

뉴욕 센트랄 파크에 모인 반전 운동가들이 흰색과 검은색의 풍선을 하늘로 날리고있다. 검은색은 닉슨 정책에 의해 희생된 베트남 전사 군인을 의미하고, 흰색은 앞으로 죽을 군인을 의한다고 한다.

반전운동이 확산되자 미정부는 주방위군을 동원하여 이를 저지하였다. 사진은 1970년 4월 켄트 주립대학교에서 시위하다가 총을 맞은 학생이다. 그는 부상만 당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사망자가 4명이나 발생하여 미국인들의 분노를 촉발하였다.

미국의 항공기 스카이레이더 공격기가 네이팜탄을 베트콩이 숨어있다고 의심되는 한 사원에 투하하였다. 사진의 중심부에 사원의 첨탑이 보인다. 카메라맨과 여러 나라에서 온 기자들이 이를 지켜보았다.

미국의 네이팜탄 투하후 사원에서 어린이들이 뛰쳐나오고있다. 맨 왼쪽의 남자는 눈을 잃었고, 다음의 여자아이는 9살로 온몸에 화상을 입었다. 그녀는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지금도 미국에 살고있다. 이름은 Kim Phuc.

세계의 기사가 이 어린 소녀 Kim Phuc에게 집중되었다. 소녀의 뒷모습에서 화상의 깊은 상처를 볼수있다.

HH-53 helicopter에서 본 전쟁에 나서는 헬기 특전 부대.

자신의 작은 부대에 미국국기 게양

작전중 부상당한 병사를 의무병이 임시 치료했다.

바로 옆에 폭탄이 터지는데도 너무나 태연한 남베트남 군인. 정확하게 이장면을 한 종군기자가 담아냈다.


사이공의 미공군 기지 주변에서 폭팔이 발생하고 전투가 벌어진뒤. 사살된 3명의 북베트남 군인의 사체가 보인다.

북베트남의 공격이 정확하게 미군 벙크에 직격했다.

한 공수병이 부상을 당하고 비와 고통을 참으면서 후송을 기다리고있다. 오른쪽 아래의 병사는 사망했는지.....

포로로 잡혔던 로버트 중령이 전후 3년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캘리포니아 트레비스 공군기지. 1973년

미국의 패색이 짙어지고 이곳 저곳에서 철수를 시작한다. 적이 눈앞에 다가오자 긴급하게 철수를 하고있는 미해병과 베트남 해병 기지.

미군이 베트남 여인과 아기를 검쉽헬기에 태워 철수하고있다.

미군 공군 기지를 점령한 베트남 군인들이 미군이 철수하면서 설치한 폭탄이 폭팔하자 대피를 하고있다.

전쟁 막바지인 1975년 4월 29일 베트남 사람들이 미군헬기를 얻어타기위해 미국 대사관에 모여 담을 기어오르고있다.

사이공에서 부터 이송시켜올 더 많은 피난 항공기의 공간을 위하여 마련하기 위해 헬리콥터를 연안 바다로 밀어버리는 미군

미군 해병대의 도움으로 헬리콥터를 얻어타서 사이공을 등지고 수륙 양용 함선에 올라타게된 베트남 어머니와 과 세아이들

1975년 북베트남 군인이 탱크를 몰고 드디어 대통령 관저를 진입하고있다. 전쟁이 끝나는 시점이다. 1975년 4월 30일이다.

이제 대규모의 학살이 시작된다. 대상은 베트남인으로 미군에 협조하거나 베트남 정부를 지지했던 사람들.. 한 여인이 무수한 사람들의 시체를 보고 두려워하고있다.